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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30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34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 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얾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68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세사르 바예호, 「여름」,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다산책방(2017))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73

나 역시 이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어딘가에 나의 메아리가 있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따.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125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 

 

169 

스테인드글라스 공방, 출판사, 목공소를 차례로 지났어요. 수사님들의 일터이지요. 목공소 화단 앞에서 톱밥들이 둥글게 말린 꽃 시늉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요.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넘어왔어요. 

"걷고 있어요?" 

백발의 수사님 한 분이 기척도 없이 제 곁에 다가와 있었지요. "같이 걸어요."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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