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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45

나의 계급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발된 구역과 개발되지 않은 구역을 가르는 '길'이었고,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담'이었으며, 학급에서 아이들이 이루고 있는 '그룹'이었다. 

 

54

언제나 혼자인 것과 항상 함께인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할까? 스무 살의 내 소원이 서울에 가는 일이었다면 스물 여섯 살의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였다. 

 

57

명문 빌라를 떠나 노후한 아파트에 전세를 살던 시절, 중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따. 우리는 가난한가? 더 이상 아파트에 살 수 없어 낡은 상가주택과 다가구주택으로 이사를 다니던 시절, 고등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가난한가? 용달차에 플라스틱 서랍장과 접이식 탁자, 이불과 책을 싣고 한강 북쪽을 전전하던 시절, 대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따. 나는 가난한가? 나는 오래 가난했던 것 같기도 했고 한 번도 가난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 가난일까? 한강다리 위에서 아파트초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 도시에서 집 한 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마음이 저려왔던 순간을 가난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어떤 방에 살아보고 나서야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의 어눌함을 자책하던 순간을 가난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전 세입자가 그랬듯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침묵한 채 폭탄 돌리기를 하는 심정으로 그 방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던 순간과, 죄책감에 휩싸여 도망치듯 떠나던 순간을 가난이라 말해도 괜찮을까?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92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어도 원하는 하나쯤은 성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혁명가, 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ㅜ정부주의자는 될 수 없어도 문학을 하는 사람을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혁명가, 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무정부주의자를 모두 합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을 버리고 쓸모 있는 노동자로 살자고 다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서른 살이,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나이가 되었다. 

 

104

내가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시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순간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34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불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서사를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타인이 내리는 정의, 규정, 낙인을 거부할 수 있다. 내 안에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불가해하고 복잡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항변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살고 싶다. 

 

159

아빠는 내가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향보다 지위의 문제였다. 

 

194

에이드리언 리치가 디킨슨에 대해 쓴 에세이의 제목은 '집 안의 활화산'이다. 나는 디킨슨이 자신니 바라던 대로 방 안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적막하지만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짐작한다. 누군가는 집 안에 길이 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집 밖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두 문장은 다르지 않다. 몸을 집 안에 두고도 세계를 유랑하는 이들이 있다. 디킨슨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는 여행자를, 먼 곳을 떠도는 은둔자를 나는 흠모한다. 나의 방-작업실-서재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외부로 나가는 길이기를 바란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디킨슨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제 자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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